한국인들은 미쳤을까 ?

by yongg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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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부터 2012년까지 엘지 프랑스 지사에서 부장, 지사장으로 일했던 에릭 쉬르데즈는 그의 신간 제목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미쳤다, 한국인들 ! 』(칼만 레비). 한국 경제의 거의 전부를 장악하고 있고, 해외에서도 삼성, 현대, 엘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한국 재벌 사회에서 프랑스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임원 즉, 재벌 경영진의 일원을 역임한 프랑스인이었던 그의 증언은 귀중하다.

에릭 쉬르데즈의 증언은 그러니까, 더 이상 하향 불가능한 가격의 복제 저가품 말고는 내놓을 능력이 없어, 지난 세기 막바지까지만 해도 경쟁자들의 웃음거리였던 이 다국적 기업들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그 내부에서부터 알아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오늘 이들은 무서운 경쟁자로 부상했음은 물론, 각자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화자는 이제 그의 서사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한국의 다국적 기업 한복판에서 그가 보낸 8년을 기술하기에 서사라는 말이 잘 들어 맞을 것 같다. 자기 분야의 프로로 맷집 두둑했던 에릭 쉬르데즈였음에도 그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엘지에서 지사장으로 일하면서 겪었던 충격이 얼마나 만만찮았고, 그 뒤로 따라온 8년이 고생스러웠던가다.

충격은 우선 극심한 긴장과 거의 매 순간 따라다니는 스트레스에서 왔다. 저자는 당근보다는 채찍으로 항상 더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를 향해 말을 몰고 가는 그룹의 극단적으로 엄격한 위계 구조에 대해 설명해 준다. 영리 조직이라면 어디에서든 목표에 따른 스트레스는 감수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자신이 일했던 엘지 만큼 심한 정도는 보기 드물다는 것이다. 그는 주장한다. “인간은 비난보다는 칭찬 속에서 더 나은 성과를 이끌어낸다는 생각이 한국인들에게는 안중에도 없었다.”

화자는 특히 한국인들의 효율성에 대한 집요한 추구라는 측면에 감탄하는 만큼 두려움도 내비친다. 모든 개별 과업은 면밀하게 분석되고 되도록 더 작은 단위로 나누어질 수 있도록 쪼개진다. 성과 향상을 위해서다. “서양인의 눈에는 거의 이해 불가한 방식이지만, 한국 기업은 무엇이든 면밀하게 순수한 양적 분할 방식을 적용하는 덕분에 주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해 낸다.”

이 두 가지 현상이 초래한 인간적 요소 상실이라는 결과는 걱정할 만하다. “왜냐하면 각자가 자신보다 더 위에 있는 누군가가 지시한 목표를 향해 달린다. 그 누군가 역시 자신에게 부과된 성과를 얻어야만 한다. 항상 결정하는 사람과 실행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일반적 법칙 아래 회사가 굴러간다. 이와 동시에 밑에 있는 사람은 승진할 기회만 보고 있고, 옆자리 동료는 자신보다 더 나은 업무 수행 능력을 보여줄 지도 모른다. 이런 시스템은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반면, 한 사람의 업무 성과를 판단할 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정서적인 측면은 계속해서 무시하게 된다.” 안타까운 장면이다.

갈수록 우리 일상을 파고드는 한국 기업이 늘어나는 환경에서 이 같은 현상을 어떻게 아무 걱정 없이 바라볼 수 있겠는가 ? 글로벌 시장에서 ‘비인간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경쟁자를 상대로 어떻게 싸울 수 있을 것인가 ? 게다가 저자에 따르면 정작 한국인들 자신은 한국 기업의 이러한 기능 방식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저자는 단언한다), 한국인은 “하루 두 번 45분 식사 시간과 5분 흡연 휴식 몇 번이면 컴퓨터 앞에 묶여서 열 두 시간 열 네 시간씩 일해도 절대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의 존재는 회사에 바쳐진 것이고, 회사가 아니라면 개인적인 자아실현은 어떤 형태로든 생각조차 불가능하다.”

이러한 시스템은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에게는 업무 동기로 작용한다. 이후 저자는 엘지 그룹 경영진 400명 중 하나로까지 기세 좋게 올라갔지만, 기업의 저성과와 경영진 교체 속에 소외당한다.

이 책은 재벌 기업 문화 속으로의 몰입이라는 흔치 않은 경험을 제공해 주고, 한국 기업의 성공을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정보 역시 풍성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책을 흥미롭게 만들어 준 이 두 가지 요소는 방향을 잘못 잡았다.

저자는 한국 기업 조직의 긍정적 효과 두 가지로 기업가 정신과 업무 효율성을 꼽는다. 그런데 내 눈에는 바로 이 두 가지 요소가 한국 경제의 약점이다.

우선 기업가 정신부터 보자. 기업가 정신은 위험 감수와 혁신하는 문화의 가치를 모르고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조직이 자기 내부에서 기업가 정신을 독려하기 위해서는 실패 가능성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목표 과업을 수행하는 동시에 향후, 다시 말하자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혁신 과제 역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저자가 잘 설명하듯, 재벌 내부의 결정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자리는 ‘임시직’이라 불릴 만큼 불안정하다. 그들의 시간에도 제한이 있다. 어떤 ‘임원’이 1년 내에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성과를 충분히 생산하지 못하고, 자기 목표도 달성하지 못한다면 회사 문 밖으로 나갈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기업가 정신에 입각한 프로젝트는 전부가 위험 감수 요소를 지니고 있고, 향후 긍정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 영향 역시도 피부로 느껴지기에는 보통 수 년이 걸리기에, 결정권자의 승인을 얻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국 기업의 진짜 힘은 업무 효율성보다는 위기 관리 능력에 있다. 위기 관리시 본질적인 세 가지 특성이 한국 대기업 대부분의 DNA속에 들어 있다. 조직에 이견의 여지를 주지 않는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며, 사실상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는 권위적인 사장, 조직의 명령에 전적으로 반응하며 조직이 전속력으로 질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규범에 단련되어 있고 헌신적인 개별 부서들, 마지막으로, 결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거의 무제한으로 공급되는 자원들이다.

한국 기업들이 기업가 정신에 얼마나 취약하고, 위기 관리에는 얼마나 강한지는 휴대폰 단말기 분야에서 유명한 다른 한국 대기업 삼성전자의 변화 과정을 돌이켜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2007년 애플이 가히 혁명적이었던 아이폰을 들고 휴대폰 분야에 상륙했을 때, 당시 해당 분야 선두 기업들 중 오직 삼성만이 그 여파에 결국 대등할 수 있었고, 가장 무시할 수 없는 경쟁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해당 분야 선두 자리를 차지하고, 위기에서 멀어지자 삼성은 선두 자리를 공고히 다질 수 있을 정도의 혁신적인 제품을 그의 미국 경쟁사가 하는 것처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창조경제’에 대한 현 한국 정부의 집착과 ‘스타트업’ 양성소 설립을 돕기 위한 전방위적인 발의만 봐도 알 수 있다. 정치지도자들은 기업과 정신과 혁신 측면의 약점이 국가 경제의 위험 요소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저자가 찬양해마지 않는 한국 기업 조직의 업무 효율성도 이론의 여지가 있다. 업무 효율성 측정의 기준으로 노동 생산성을 고려한다면, 한국 노동자는 전혀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지 않다. 어쨌거나 프랑스 노동자보다는 훨씬 비효율적으로 일한다. OECD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 노동자의 시간당 생산성은 61달러인데 반해 한국 노동자의 생산성은 28달러에 불과하다.

프랑스인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이 1554시간인데 반해, 한국인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193시간이라면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저자가 그려 놓았듯 아침부터 저녁까지, 토요일, 어떤 때는 일요일까지도 일해야만 한다면, 이 끝없는 노동 시간 중 일부가 상사가 퇴근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일이나, 인터넷 서핑, 아니면 몰래 꾸벅꾸벅 조는 일에 할애될 수 있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업무 효율성 덕분이라기보다는 유별난 노력과 헌신의 힘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토록 짜증이 났던 이유가 단지 이 몇 가지 판단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제목 탓도 분명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한국 기업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한국인들이 전부 미쳤다고 외치는 것은 지적 능력이 의심되는 속단이다. 그러나 책 한 권의 가치를 일부러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선택한 제목 하나로 판단하는 것도 그렇게 정당한 일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저자가 한국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전체 한국의 맥락에서 주장할 때, 그가 한국 사람들에 대해 느낀 바를 전체 한국 사람들 또는 ‘한국인의 의식’으로 확장해서 주장할 때 문득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대체 불가능한 콤비로 유명한 장-미셸 라르케와 티에리 롤랑이 해설했던 프랑스 대 한국의 축구 경기였다. 저 유명한 해설자들은 이 경기에서 그들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을 여과 없이 드러냈고 (“한국인들은 누가 누군지 구별이 안 가네요. 축구 유니폼을 입고 있으니 더 그래요. 키는 전부 170Cm이고, 전부 검은 머리잖아요. 골키퍼만 빼고요.”) 이것은 경기와 관계 없는 논평이었다는 말들이 많았다.

나로 말하자면, 나야말로 검은 머리에 키는 170Cm이지만, 당시 해설자들의 논평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들에 말을 보태지는 않았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축구 경기 맥락에서라면야 이런 논평도 나올 수 있는 거라고 판단했었다. 물론 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쉬는 시간 운동장에서 “야, 짱개!”라고 나를 향해 외치던 동급생들에 대한 기억도 어렴풋하게나마 다시 떠올랐지만, 티에리 롤랑 식의 저런 논평에까지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회에 산다는 것도 우리가 반드시 열망해야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나는 에릭 쉬르데즈가 내놓은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일반화는 조용히 넘기지 못하는가 ? 그건 아마도 이거야말로 축구 경기 맥락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한국 경제와 사회의 몇 가지 기초 원칙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으로 간주되는 한 권의 책이다.

또한 결국 나는 이 모든 설명들이 무엇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들인가도 궁금하다. 물론 저자에게는 엘지 그룹에서 직접 쌓은 경험이라는 유일무이함이 한국 재벌의 세계를 우리에게 이해시켜주기 위한 정당성과 충분한 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재벌 회사들 중 한 곳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이해하는 것으로 모든 한국인들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을까 ? 이렇게 묻는다면 나올 만한 변호의 소리가 벌써 들리는 것 같다. 그렇다. 한국 국내총생산의 80%를 5대 재벌이 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 나라의 자원 생산을 몇몇 그룹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수적 가치다. 우리가 인간적 요소에 관심을 갖고, 직업 활동을 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수를 헤아려 본다면 그 중 단 16.2%만이 한국 30대 재벌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한국개발연구원 자료).

더구나 에릭 쉬르데즈 본인도 자신의 책 말미에서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가장 큰 회사 중 한 곳에서 8년을 보냈고 수십 번 한국을 오갔지만 결국 나는 한국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고. 엘지에서 일하는 내내 업무와 사방이 차단된 곳에서의 ‘팀 빌딩’ 연수로 녹초가 되었던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얕은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한국인들의 진실을 규정하는, 이론의 여지가 있는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비난할 것이다. 결국에는 대체 무엇을 바탕으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 어떻게 “한국 사람들은 (…) 자신들이 일본 사람들이 말하는 무식한 농부가 아니라고, 어떻게든 증명해 내려고 했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고 단언할 수 있는가 ? 그것이 « 한국 사람들은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안 가네요.” 처럼 거의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정당하지 못한 전제로 나오는 말이 아니고서야 무슨 근거로 자신의 제한된 관찰 경험을 한 국가 전체에 확대 적용할 수 있는가 ?

나의 이런 규탄이 내 머리색에서, 나의 이런 반응도 한 줄기 망상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의 행간에서 암암리에 드러나는 메시지는 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이 책을 읽은 어떤 사람들은 한국인들은 « 좀 전부 똑같다 »는 것만 기억하고, 한국인들은 우리보다 덜 인간적이라는 결론까지도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자는 자신의 고생스러웠고 결국엔 불행했던 엘지에서의 경험에 힘입어, 한국인들이 마치 언제라도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을 준비가 되어 있는 획일적인 로봇들처럼 비인간적이고 두려운 존재라는 인식을 부추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런 삶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없다. 세계보건기구가 조사한 국가별 자살률을 찾아 보는 것만으로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자살률 상위2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인생의 황혼기를 허술한 퇴직연금과 간신히 남은 집 한 채에서 맞이하기 위해, 고용주를 위해 평생을 바치며 기진맥진한 아버지 세대의 인생 여정과는 다른 것을 열망하는 젊은 대학 졸업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저자는 한국 사람들이 인간성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얼마나 미쳤는지 따지기에 앞서, 엘지에서의 경험에 더해 한국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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